▲ 백원필 부원장

1. 후쿠시마 사고의 특징과 근본 원인

동일본 대지진과 초대형 쓰나미에서 비롯되었던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한지 5년이 지났다. 2만명 가까운 사망․실종자를 가져온 지진과 쓰나미는 잊혀져가지만, 후쿠시마 사고는 여전히 커다란 관심사이다. 후쿠시마 사고의 핵심적인 특징은 다음 3가지이다.

• 극한 자연재해로 인한 최초의 원전 중대사고: 1979년의 TMI 사고(미국)와 1986년의 체르노빌 사고(구 소련)는 설비 내부 문제로부터 비롯되었으나 후쿠시마 사고는 외부적인 사건, 즉 극한 자연재해에서 비롯된 사고이다. 애초 미흡했던 다수의 안전 설비와 사고 관리 대책이 쓰나미에 의해 무력화되어 대형 사고로 진행된 것이다.

• 다수 호기에서 동시에 중대사고가 발생하여 장기간 지속: 여러 기의 원자로에서 핵연료가 대량으로 녹아내리고 원자로용기와 격납용기가 손상되었으며, 수소가스의 폭발로 원자로건물이 크게 손상되었다. 또한, 안정적인 상황을 확보하기까지 수 개월이 걸렸다.

• 대량의 방사성물질 외부 방출로 광범위한 토양 및 해양 오염: 체르노빌 사고의 10~20% 수준으로 평가되는 방사성물질이 방출되어 원전 주변의 토양과 해양이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비상 대피가 비교적 잘 이루어져서 직접적인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사고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원전의 설계․건설․운영 과정에서 대형 지진과 쓰나미가 빈발하는 일본의 특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데 있다. 지진과 쓰나미에 대한 최초 설계기준이 지진이 거의 없는 한국보다도 낮았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 후 대형 지진에 대한 대책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었으나, 쓰나미에 대비한 실질적인 보강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쓰나미를 현실적으로 고려하여 핵심 안전설비들의 위치만 변경했더라도 사고 결과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안전에 중요한 의사결정들이 최상의 과학기술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안전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나 정치․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2. 원전 안전성 확보의 기본 방향
한국원자력학회 후쿠시마위원회(위원장: 백원필)에서는 후쿠시마 사고의 중요한 교훈으로 ① 안전 철학 및 확보체계, ② 중대사고 예방을 위한 설계 안전성, ③ 중대사고 대처 능력, ④ 비상대응(방재) 체계, ⑤ 원자력 안전 기반 등 5개 분야에서 총 22개 항목의 교훈을 도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 원전의 안전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기본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 바 있다.

첫째, 후쿠시마 사고 후 발표된 안전성 개선대책을 포함하여 가동원전의 안전성 향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둘째, 2011년10월 출범한 원자력안전위원회를 중심으로 안전규제의 독립성․전문성․효과성을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셋째, 국제기준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독자성을 갖는 안전 철학․목표․원칙․기준을 발전시켜야 한다.

넷째, 원전 안전과 관련하여 운영기관인 한국수력원자력(주)이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다섯째, 후쿠시마 사고의 교훈과 최근의 연구 성과들을 반영하여 안전성을 더욱 향상시키는 신형 원전 개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여섯째, 원자력 안전 연구를 강화하고 최상의 지식에 기반하여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곱째, 원자력 안전 문화가 모든 기관과 종사자에게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

여덟째, 원전 개발 및 운영에 있어서 리스크 정보의 활용이 확대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제 협력을 더욱 강화하고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이상의 안전성 확보 방안들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개념은 ‘최상의 지식에 기반한 의사결정’ 또는 ‘최상의 지식에 기반한 심층방어(Defense-in-Depth)’이다. 이를 필자는 <그림 1>과 같이 표현하면서, ‘Do the Right Things Right! (올바른 일을 제대로 하자)’고 주장해오고 있다. 여기서 첫 번째 ‘Right’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나타내고, 두 번째 ‘Right’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나타낸다. 해야 할 일을 잘 찾아내는 것이 우선 중요하지만, 그 일을 제대로 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한데 소홀히 되는 경우가 많음을 강조하고 싶다.

3. 사고 후의 원자력 안전 연구
원자력 안전연구는 원자력 시설의 안전성을 평가․검증하고, 고장과 사고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며, 궁극적으로는 안전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연구활동이다. 원자력 안전연구의 성과물인 안전 원천지식과 안전성 평가․검증 인프라 및 전문․인력이 다양한 측면의 지식 기반 의사결정에 활용되어 궁극적으로는 안전하고, 경제적이며, 국민이 신뢰하는 원자력 이용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원자력 안전 연구는 과학기술처(현, 미래창조과학부)가 원자력연구개발 중장기계획사업을 착수한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수행되어 왔다. 특히 2000년을 전후하여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져서 세계적 수준의 연구 시설들이 구축되고, 열수력 안전해석이나 확률론적 안전성평가 소프트웨어 개발, 원자력 안전 전문가 확보 등의 측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 통해 국내의 원자력 안전기술의 자립과 원자로 및 핵연료 안전성 평가․검증체계 확보에 크게 기여했으며, UAE 원전 수출과 요르단 연구용원자로 수출 등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OECD 원자력기구의 대형 실험 프로젝트(원자력연구원의 TROI 실험장치를 이용한 증기폭발 실험, 원자력연구원의 ATLAS 실험장치를 이용한 냉각성능실험 등)를 주관하는 등 국제적인 위상도 크게 강화되었다.

현재 정부의 원자력 안전 연구는 미래창조과학부(미래부),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 등 3개 부처가 주관하고 있다. 미래부는 원자력 안전 기반원천기술 및 공통활용기술을, 원안위는 안전규제 적용기술을, 산업부는 가동원전 안전성을 비롯한 상용원전 적용기술을 중심으로 연구개발을 수행하며, 정부 안전연구 간의 연계체계를 <그림 2>에 제시하였다.

원자력 안전 연구에는 연구기관(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등)과 산업계(한국수력원자력 등) 및 대학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 기술적인 관점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은 미래부에서 주관하는 원자력 안전 기반기술 연구를 중점적으로 수행하면서, 그 결과를 안전규제와 상용원전에 적용하기 위한 타 부처 연구 사업들도 지원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특히 강화된 안전 연구 분야는 다음과 같다.

• 설계기준초과 사고 시의 원자로 냉각 특성 평가를 위한 실험 및 정밀 해석기술
• 중대사고 핵심 현상 규명과 해석 및 대응 기술
• 극한 자연재해를 포함한 외부사건 재해도 평가 및 응용 기술
• 다수 호기 원전 부지의 리스크 평가 및 사고 관리 기술
• 원전 사고 시 방사성물질의 확산(대기, 해양) 및 영향 평가와 비상대응 기술
• 원전 안전성의 획기적 향상을 위한 가동원전 및 신형원전 적용 기술

현재 우리나라 원자력 안전 연구의 수준은 전반적으로 선진국에 진입하는 단계이고, 일부 분야는 세계적인 리더그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전체적인 전문가 층이 얇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핵심기술 분야들도 있어서 지속적인 연구개발이 필요하다. 또한 최상의 연구성과물이 생산되고 산업과 규제에 실제로 활용되어 안전성 향상에 기여하기 위한 체계도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4. 사고 후의 원자력 안전 정책
후쿠시마 사고 후 지난 5년간 우리나라의 원자력 안전 정책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이중 대표적인 것은 2011년 10월 독립적 규제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가 발족한 일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2인의 상임위원(위원장, 사무처장)과 7인의 비상임위원으로 구성되며, 실무를 관장하는 사무처가 있다. 독립 행정기구로서의 원자력안전위원회 발족과 함께 위원 구성과 회의 진행 방식도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우선 비상임위원 중에는 원자력 반대 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온 2인이 야당 추천 인사로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정기적인 위원회 회의는 공개되며, 회의 자료뿐만 아니라 각 위원들의 발언이 속기록 형태로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규제활동의 투명성이 크게 높아졌으며, 중장기적으로 국민의 신뢰를 높이는 데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설계기준을 초과하는 상태에서의 안전성을 확인하고 개선사항을 도출하기 위한 스트레스 테스트가 일차적으로 장기가동원전(월성 1호기, 고리 1호기)에 대해 수행되어 안전성 확인과 개선에 크게 기여하였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이를 전 원전으로 확대하기로 하였으며, 이는 이미 시행되고 있는 주기적 안전성 평가와 함께 가동 원전 안전성 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월성 1호기 스트레스 테스트 검증을 위한 민간검증단 활동과 관련하여 드러난 몇 가지 문제점들은 합리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원자력 시설에 대한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을 확대한 것도 중요한 변화이다. 원전의 경우 과거에는 반경 8~10 km 구역을 비상계획구역으로 설정했었으나, 후쿠시마 사고 교훈을 반영하여 반경 20~30 km로 확대하였다. 이 중에서도 반경 3~5 km의 구역은 방사선 비상 시 주민을 사전에 대피토록 하는 ‘예방적 보호조치구역’으로 설정하여 발전소 인접하여 거주하는 주민의 피폭 가능성을 더욱 낮추었다.

최근에는 중대사고를 포함한 사고관리계획서 작성이 법제화됨으로써, 중대사고가 강제적인 안전규제체계에 포함되었다. 현재 세부적인 기준 등이 마련되고 있는데, 이를 효과적으로 추진한다면 안전성 확보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2012년부터 드러난 원전 비리 문제가 원자력 및 안전에 대한 국민 신뢰를 크게 저하시켰다. 국민 수용성 관점에서는 후쿠시마 사고보다도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도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새로운 제도들이 다수 도입되었는데, 실질적인 기여도를 확인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요약하면, 후쿠시마 사고는 원자력 이용에 있어서 안전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상기시켰고, 이에 따라 국내 원자력 안전 정책과 제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는 전반적으로 안전성 확보체계를 상당 수준으로 강화시킨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부는 시행 과정에서 상당한 혼선을 빚기도 하였고, 통합적인 관점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데는 부족한 부분도 있다. 따라서 새로 도입된 정책을 비롯하여 기존 제도 및 정책들의 효과를 분석할 필요가 있고, 향후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때는 충분한 사전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5. 맺는 말
필자는 후쿠시마 사고를 겪으면서 ‘무지(無知)’와 ‘자만(自滿)’이라는 단어들을 자주 떠올렸다. 설계와 운영에서 당연히 고려했어야 하는 쓰나미 높이가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고, 중대사고에 대한 대책이 크게 부족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중요한 의사 결정자들이 안전에 대한 총체적인 지식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안전에 대해 과신한 결과라고 본다. 후쿠시마 사고의 교훈을 반영하여 실질적인 안전성 향상을 꾀하려면 정확한 지식에 기반한 의사 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인류 문명은 도전을 극복하면서 발전하여 왔다. TMI 사고 후속조치를 통해 원전의 안전성이 크게 향상되었듯이, 후쿠시마 사고 교훈의 적극적인 반영을 통해 국내 원전의 안전성이 더욱 향상될 것이다. 원전 안전성의 향상은 하드웨어 측면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소프트웨어 측면의 보강이 함께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특히 원자력분야의 글로벌 리더 그룹으로 진입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기존의 산업, 행정, 기술 체계의 장점은 적극적으로 살리면서도, 책임있는 리더로서의 자세 전환과 이에 걸맞은 역량 강화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확고한 안전문화의 확립과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안전성 확보 노력, 국민과의 투명하고 효과적인 소통이 원자력이 나아갈 길이라고 판단한다. “Do the Right Things Right! (올바른 일을 제대로!)”를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글을 맺는다.